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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 몽양기념사업회
제80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으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 저축은행휴학생대출 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중국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 생애첫주택구입 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친일파 암살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 제2금융권대출한도 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1876~1949)·김규식(1881~1950)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한에서는 보수세력들이 그를 '월북자'로 낙인찍으며 배척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목숨 학사지원 을 걸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그의 공로는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들이 당한 비극이었다. 1950년 7월 초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경남 밀양의 김원봉 생가에 군경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표적은 김원봉의 네 동생인 김 부동산대출 구봉·김용봉·김봉기·김덕봉이었다.
당시 22세로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막내 김구봉(1928~1950)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끌려갔다. 아무런 죄목도, 재판도 없었다. 단지 '월북자' 김원봉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렇게 끌려간 네 형제는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
이승만의 철저한 정치적 숙청
▲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막내 동생 김학봉씨가 생전인 2015년 8월 14일 오전 밀양시 삼문동 자택에서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 연합뉴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김구 계열과 김원봉 일가는 그 핵심 타깃이었다.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당했고, 김원봉의 형제들은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을 틈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멸균실 수준'으로 철저히 제거해버린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지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전시에 적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해 대량 학살한 것이다.
공식 통계만으로도 4934명이 희생됐지만, 실제로는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까지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원봉의 동생들은 보도연맹원도 아니었지만, 단지 '빨갱이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이 참극에 휘말린 것이다.
김구봉의 아들 김용건씨는 2020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떤 얼굴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아버지가 학살당하던 1950년 7월 어머니 배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원봉은 초기에는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이후 북한에서도 그에 대한 명예 복원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김원봉이 중국을 무대로 30여 년간 항일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던 아나키스트 출신의 비주류 좌파라는 이유로 굳이 기릴 이유를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렇게 김원봉과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북한에서는 '반당 분자'로, 중국에서는 '비주류'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야말로 삼중고의 비극을 겪은 것이다.
75년 만에 밝혀진 진실과 과제
▲ 밀양에 있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
ⓒ 윤성효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은폐작업은 군사정권 시대를 거쳐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11월,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마침내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임을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희생자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
김원봉 집안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나 명예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김원봉의 경우 남북분단과 이념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의 월북이라는 선택을 두고 여전히 찬반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공로만큼은 이념을 떠나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역사학자들은 김원봉을 독립운동가 재평가 1순위로 꼽고 있다.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2015년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가 큰 화제가 됐고, 2019년에는 그의 출생지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원봉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그의 동생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식적인 사과나 명예회복 조치도 없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이런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순수한 애국정신으로 조국광복에 헌신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통합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교육과 인권의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했던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묻는다. 언제까지 약산 김원봉과 그 가족들을 비운의 희생자로 남겨둘 것인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야 했고, 그의 형제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적 정의를 실현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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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양기념사업회
제80회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 의열단을 창설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으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한 그는 일제강점기 가장 활발한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 저축은행휴학생대출 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공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9년 중국에서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들이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 생애첫주택구입 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친일파 암살을 통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김원봉은 이후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해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 제2금융권대출한도 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김원봉은 1948년 김구(1876~1949)·김규식(1881~1950)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남한에서는 보수세력들이 그를 '월북자'로 낙인찍으며 배척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목숨 학사지원 을 걸고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그의 공로는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들이 당한 비극이었다. 1950년 7월 초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경남 밀양의 김원봉 생가에 군경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표적은 김원봉의 네 동생인 김 부동산대출 구봉·김용봉·김봉기·김덕봉이었다.
당시 22세로 부산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막내 김구봉(1928~1950)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끌려갔다. 아무런 죄목도, 재판도 없었다. 단지 '월북자' 김원봉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렇게 끌려간 네 형제는 밀양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국민보도연맹원 300여 명과 함께 집단 학살당했다.
이승만의 철저한 정치적 숙청
▲ 경남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막내 동생 김학봉씨가 생전인 2015년 8월 14일 오전 밀양시 삼문동 자택에서 약산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 연합뉴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는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김구 계열과 김원봉 일가는 그 핵심 타깃이었다.
김구는 1949년 6월 암살당했고, 김원봉의 형제들은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라는 혼란을 틈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멸균실 수준'으로 철저히 제거해버린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지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전시에 적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해 대량 학살한 것이다.
공식 통계만으로도 4934명이 희생됐지만, 실제로는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까지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원봉의 동생들은 보도연맹원도 아니었지만, 단지 '빨갱이의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이 참극에 휘말린 것이다.
김구봉의 아들 김용건씨는 2020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어떤 얼굴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아버지가 학살당하던 1950년 7월 어머니 배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원봉은 초기에는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0년대 중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8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이후 북한에서도 그에 대한 명예 복원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김원봉이 중국을 무대로 30여 년간 항일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던 아나키스트 출신의 비주류 좌파라는 이유로 굳이 기릴 이유를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렇게 김원봉과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는 '월북자'로, 북한에서는 '반당 분자'로, 중국에서는 '비주류'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야말로 삼중고의 비극을 겪은 것이다.
75년 만에 밝혀진 진실과 과제
▲ 밀양에 있는 의열기념관과 의열체험관.
ⓒ 윤성효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은폐작업은 군사정권 시대를 거쳐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전국 각지에서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 2009년 11월,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마침내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임을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희생자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
김원봉 집안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나 명예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김원봉의 경우 남북분단과 이념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의 월북이라는 선택을 두고 여전히 찬반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공로만큼은 이념을 떠나 인정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역사학자들은 김원봉을 독립운동가 재평가 1순위로 꼽고 있다.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2015년 영화 <암살>에서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가 큰 화제가 됐고, 2019년에는 그의 출생지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원봉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그의 동생들이 당한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공식적인 사과나 명예회복 조치도 없었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이런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순수한 애국정신으로 조국광복에 헌신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민통합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역사교육과 인권의식 제고가 필요하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 했던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묻는다. 언제까지 약산 김원봉과 그 가족들을 비운의 희생자로 남겨둘 것인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야 했고, 그의 형제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역사적 정의를 실현할 때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