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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 ‘다이애나’의 등장
태풍관련주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0, 캔버스에 유채, 81x65cm, 포그 박물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께서 몸소 강림한 듯하군.
1745년 2월 25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가면무도회. 루이 15세는 다이애나 차림으로 온 잔 앙투아네트 15tv
푸아송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잔은 갸름한 얼굴과 여리여리한 뼈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흰 피부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걸었다. 보이지 않는 님프 무리를 시종으로 데려온 듯 당차게, 경쾌하게 움직이며 루이 15세를 향해 다가왔다. 거기다…
“어머나. 죄송해요.”
그녀는 루이 15세 앞에서 릴게임안전사이트
갑자기 손수건을 흘렸다. 이를 줍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슬쩍 드러나는 볼륨감. 루이 15세는 그 또한 얼떨결에 손수건을 향해 몸을 굽히며, 그녀의 앞자락 천이 가렸던 은밀한 부위를 엿볼 수 있었다.
루이 15세는 미인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여성의 그 신체 부위가 예쁜 모양이면 사족을 대신증권 주식
못 썼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눈앞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당시 루이 15세는 서른다섯 살, 잔은 스물넷이었다.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잔은 자신보다 먼저 손수건을 주워 건네는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뒤,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사라졌다. 이제 루이 15세는 애타는 마음으로외환송금
그녀를 찾아다니기에 여념 없었다.
장 마르크 나티에, 다이애나 분장을 한 퐁파두르 부인, 1746, 캔버스에 유채, 102x72cm, 베르사유 궁전
…드디어 사로잡았다.
돌아선 잔은 이쯤에서 곧장 표정을 바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껏 잔이 보인 모든 건 설계에 따른 행동이었다. 오직 한 목표. 루이 15세를 유혹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의 제1 애인, 이른바‘메트레스 앙 티트르’(maîtresse-en-titre)에 오르는 일. 잔은 이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시절 가장 세련된 초상화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6, 캔버스에 유채, 212x164cm, 알테 피나코테크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화사한 외모.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잔의 초상화다. 과연 왕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뒤 조화와 리본,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꽃으로 수놓은 드레스, 그 틈에서도 빛을 발하는 진주 팔찌, 주변의 거울과 깃펜, 초와 편지지 등은 고급스러운 기운을 띄워준다.
청록색의 깊은 두 눈과 손에 쥔 책에서 영민함을, 긴장을 이어가는 척추를 통해선 뜻밖의 강인함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제목은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다.
다소 ‘민중적인’ 본명을 단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Poisson·프랑스어로 물고기란 뜻)의 초상화>라는 이름 말고, 보다 고급스러운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잔이 퐁파두르 지방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고, 일종의 ‘신분 세탁’에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즉, ‘무도회 작전’ 등으로 끝내 루이 15세를 유혹하고 말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잔도, 푸아송도 아닌 ‘마담 드 퐁파두르’로 불리게 된 그녀. 애초에 그녀는 왜 왕의 애인이 되고자 했을까. 압도적 영향력을 품은 후부터는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네 딸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언에…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스케치, 1750, 캔버스에 유채, 62.5x46cm, Waddesdon Manor
물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잔, 그러니까 퐁파두르는 원래 평민의 자식이었다.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은 별 볼 일 없는 사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친부(親父)가 맞는지를 놓곤 지금도 논란이다.
어머니 마들렌 데 라 모트의 직업은 당시 고급 매춘부, 코르티잔(Courtesan)이었다.
퐁파두르가 아홉 살이 된 어느 날, 어머니는 어린 딸과 함께 점술가를 찾았다. 앉자마자 들을 수 있던 말은…
네 딸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리라.
이런 예언이었다.
들뜬 모녀는 그쯤부터 왕의 눈에 들기 위한 장기 계획을 세웠다.
우선 퐁파두르는 문학과 철학, 예술과 수사학 등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천문학적 수업료는? 어머니의 당시 애인이었던 부유한 부르주아가 대신 냈다. 이 사내는 자기 조카와 퐁파두르를 결혼시켜 돈과 배경을 얻게 만들기도 했다.
가까운 미래, 설계대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가 눈이 맞자 조카에게 “때가 됐으니 아내를 포기하라(이혼하라)”고 설득한 이 또한 그였다. 이런 만큼, 학계에선 그를 퐁파두르의 진짜 친부로 추정키도 한다.
퐁파두르는 머리도 좋고, 근성도 있었다. 야망도 컸다. 그 크기는 스스로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녀는 수월히 예법과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 나날이 아름다워진 일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유명 코르티잔이 될 정도로 예쁜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났으니.
천천히, 그러나 항상 앞으로.
퐁파두르는 이런 식으로 루이 15세에게 한 발씩 다가갔다. 운명의 여신도 함께 섰다. 다행히(?) 루이 15세는 정부(情婦)를 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한 귀족 가문의 네 자매와 돌아가며(!) 밀회를 즐길 지경이었다.
이런 만큼, 루이 15세는 폴란드 출신 왕비인 마리아 레슈친스카에 대한 지고지순한 마음도 없었다.
샤를 앙드레 반 루, 정원사로의 퐁파두르 부인, 1754~1755, 캔버스에 유채, 베르사유 궁전
퐁파두르가 루이 15세에게 다가갔을 때는, 때마침 그의 많은 첩 중 가장 사랑하던 이(샤토루 여공작)가 병으로 숨진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퐁파두르는 루이 15세가 때마침 적적함을 느낄 무렵을 잘 파고든 셈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퐁파두르는 가면무도회에서 루이 15세를 구워삶기에 성공한다.
퐁파두르는 그해 9월에 루이 15세가 기거하는 곳, 베르사유 궁전으로 몸을 옮길 수 있었다.
다만, 다이애나 분장의 시기, 무도회 당시 그녀가 보인 회심의 ‘계략’ 등 드라마틱한 상황을 놓곤 아직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 극적 묘사와 표현을 즐기는 프랑스인 특유의 기질상, 적지 않은 부분이 각색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이렇게 확실했다.
‘왕의 애인’이 될 수 있던 이유
작자미상,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36x27cm, 개인소장
퐁파두르는 곧‘메트레스 앙 티트르’가 되는 꿈도 이룬다.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 당시 프랑스 왕실의 관습을 짚어보자. ‘메트레스 앙 티트르’. 그녀가 그토록 바란 이 칭호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는 왕의 여러 정부 중에서도 한 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직이었다. 다른 정부들과 달리 왕에게 직접 조언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인사와 정책 수립, 심지어는 외교 전략을 놓고도 입김을 가할 수 있는, 상황에 따라선 왕비보다 더 존재감을 갖는 사실상의 ‘공인 애인’이었다.
그녀는 이 목표를 어떻게 일사천리로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눈치 빠른 퐁파두르가 루이 15세를 단박에 꿰뚫어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시 시몽 벨, 루이 15세(10대 시절), 1723, 캔버스에 유채, 베르사유 궁전
겉보기에 루이 15세는 멀쩡한 왕이었다. 그에게는 잘생긴 외모가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하긴 했지만, 성품과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퐁파두르가 볼 때 루이 15세에게는, 왕의 자질 따위 없어 보였다. 기대기를 좋아하고, 결정은 버릇처럼 미뤘으며, 결과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소심함과 심약함. 그를 둘러싼 껍질을 벗겼을 때 눈에 띄는 알맹이는 두 요소가 전부였다.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이었다.
퐁파두르는 그런 루이 15세를 있는 힘껏 구슬렸다.
그와 어떤 주제로도 말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했다. 대화가 끊길 때가 되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를 위해 직접 책을 읽어주고, 싫증을 잘 내는 성향에 맞춰선 계속해 새로운 연극과 공연을 기획했다. 특히나, 호색한인 그를 위해 밤에도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고 한다.
퐁파두르는 그렇게 루이 15세가 점점 더 본인에게 의존하게끔 했다.
‘문화’를 꽃피운 여인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 마담 조프린의 살롱, 볼테르의 비극 낭독, 1812, 캔버스에 유채, 129.5x196cm, 말메종 성
‘여후작’이 된 퐁파두르는 궁 입성 직후부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문화였다. 이는 궁 내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다.
퐁파두르는 자신의 저택 등에서 이른바 ‘살롱’을 이끌었다. 살롱은 17~18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유행한 것이었다. 유력가인 주최자가 근거지로 지식인들을 초청한 후 문예를 주고받게 하는, 일종의 사교 모임이었다.
퐁파두르는 훗날 프랑스 최고 계몽사상가에 오르는 볼테르, 계몽주의의 또 다른 큰 물줄기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 철학자를 살롱에 불렀다.
이들과 어울리며 백과전서(백과사전·Enciclopedie) 출판 작업에도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지식의 독점을 해금(解禁)하고, 온 국민이 ‘이성의 맛’을 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백과전서는 훗날 왕실을 뒤흔드는 프랑스 혁명 발발에 역할을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
퐁파두르는 이런 활동 덕에 보란 듯 지적인 인상을 챙겼다. ‘예쁘기만 하다’가 아닌, ‘예쁘기도 하다’는 인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4, 파스텔, 36.5x28.1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찬란한 미모. 퐁파두르는 본인의 이러한 강점도 십분 활용했다.
그녀는 세련된 외모와 패션으로 당대 유행을 선도했다. 온 유럽의 귀족 여성들이 그녀의 모습을 따라 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요즘 말로 ‘품절 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퐁파두르의 기민한 감각은 유럽 예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
엄숙한 바로크 양식의 쇠퇴에 결정타를 주고, 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로코코 화풍의 유행을 이끈 것. 직선 아닌 곡선, 강렬한 색채 아닌 파스텔 느낌의 부드러운 색조, 나른하고도 은밀한 표현…. 퐁파두르는 로코코 화풍의 이 기조를 따른 부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등을 열심히 후원했다.
예술에 대해선 돈이 있고, 관심이 있고, 감각도 있으니 웬만해선 좋은 영향을 미쳤다.
야망녀 퐁파두르는 어느덧 거물로 거듭났다. 이 또한, 계산대로였다.
‘7년 전쟁’ 후폭풍을 맞다
샤를 앙드레 반 루,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 1751, 캔버스에 유채, 271x193cm, 베르사유 궁전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의 모습은 늠름해보이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에게는 대군을 이끌 수 있는 열정도, 리더십도 없었다.
그러다 1755년. 퐁파두르가 서른네 살이 된 해.
퐁파두르는 영향력을 계속 이어갔다. 루이 15세와 함께 타국들 사이 외교 정책도 고심할 위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녀의 몰락 시작점이 되고 만다.
그해 오스트리아의 노련한 정치가였던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가 퐁파두르 쪽으로 접근했다. 그는 나날이 힘이 세지는 프로이센 견제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 어떻겠느냐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퐁파두르는 고심 끝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나아가 러시아의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손을 맞잡았다. 이는 훗날 여성 셋이 머리를 맞댔다고 해 ‘3부인 동맹’이란 말로 불리기도 한다.
그 건은 유럽 외교사의 대사건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직전까지 철천지원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동맹의 역전’이라는 숙어가 고유 명사로 굳을 지경이었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9, 캔버스에 유채, 91x68cm, 월리스 컬렉션
다소 감정이 섞인 결정이긴 했지만, 퐁파두르도 나름의 생각이 있기는 했다.
당시 국제 흐름을 보면 신흥 강국 프로이센은 충분히 견제 대상이 될 만했다. 다만, 결정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외교는 고차원적 종합 예술이다. 그녀가 대륙의 큰 그림을 보는 역량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결정권자인 루이 15세는 애초 별로 관심조차 없었다). 하필 그때 프로이센 국왕도 훗날 독일에서 ‘최고 군주’로 칭해질 만큼 운과 실력 다 좋았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이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 등 동맹군은 영국과 프로이센 등 군대와 맞서 7년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밀려 사실상 패배. 프랑스 재정에 적색불이 들어왔다. 해외 식민지도 여럿 잃었다. 누구에게 비난 화살이 가겠는가. 결정권자인 무르고 무기력한 루이 15세, 그에게 결정적 조언을 했던 퐁파두르였다.
견디기에 쉽지 않은 ‘애인’의 무게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서재에 있는 퐁파두르 부인, 1749~1755, 파스텔, 175x128cm, 루브르 박물관
내 인생은 끔찍해요. 1분조차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어요. 접견, 행사, 출장,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 왕비와 그 자손들에 대한 의무….
퐁파두르의 글 중 일부
루이 15세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든 퐁파두르의 삶은 화려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숨겨진 대가도 컸다. 사실, 그게 이렇게 클 것이리라곤 그녀 또한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가장 까다로운 건 루이 15세의 마음을 ‘변함없이’ 사로잡는 일이었다.
툭하면 권태를 느끼는 그를 낮이고, 밤이고 만족시키는 걸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녀는 끝내 그의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그만큼 더 많은 장치를 끌어모아야 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를 위한 비상 대기조를 자처했다.
그녀는 루이 15세가 출석하는 연회 내지 식사도 빼지 않았다. 허리를 세운 채 몇 시간이고 있어야 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정말 곤욕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퐁파두르는 유명한 소식가, 루이 15세는 알아주는 대식가였다. 즉, 퐁파두르는 그런 자리에 가면 평소 먹는 양의 몇 배는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평민 출신인 그녀는 신분에 따른 견제와 조롱도 심하게 받았다. 이른바 반(反) 퐁파두르파의 귀족들은 그녀만 없으면 수군대기 일쑤였다. 적군인 프리드리히 2세는 대놓고 그녀를 ‘생선 집 아가씨’라 부르며 비웃기도 했다.
루이 미셸 반 루, 루이 15세,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227x184cm, 베르사유 궁전
날 때부터 허약했던 퐁파두르는 서른 무렵부터는 루이 15세와 잠자리도 갖지 않았다.
낮에는 살롱으로 또 한 번 연마한 지성을 앞세운다 치고, 밤에는 이제 ‘다른 방식’을 써야 했다. 퐁파두르는 예쁜 소녀를 모집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루이 15세의 밤 시중을 들게끔 유도했다고 한다.
이 밖에 자기 자리를 노리는 다른 젊고 예쁜 여성들에 대한 감시와 단속도…. 퐁파두르는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1분조차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퐁파두르는 그렇게 영혼을 바친 덕에 루이 15세를 끝까지 휘어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민심은 험악해졌다. 따지고 보면 미숙한 지점이야 적지 않았다. 퐁파두르는 측근을 낙하산으로 곳곳에 꽂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런 그녀를 저격하는 노래가 유행가처럼 퍼질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살해 위협에도 시달렸다.
퐁파두르는 사치스럽다는 인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가 주도한 살롱, 그녀를 중심으로 피어나는 유행이 여기에 더욱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7년 전쟁에 개입했다가 후폭풍을 매섭게 맞고 만 것이었다. 그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여걸? 모사꾼?…엇갈리는 평가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 퐁파두르 부인, 1763~1764, 캔버스에 유채, 217x157cm, 내셔널 갤러리. 생의 말년에 접어든 퐁파두르 부인은 병과 과로로 인해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떻게든 권력만은 쥐고 있던 퐁파두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결국 1764년에 허무하리만큼 무력하게 죽고 말았다. 7년 전쟁이 끝나고 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실상 퐁파두르에게 국정 지휘봉을 맡긴 루이 15세는 그녀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 이때 루이 15세는 딱 두 방울의 눈물만 흘렸다는 설도 있다. 눈물이 끊이질 않고 하염없이 흘러서 그랬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원래 입체적이고, 역사는 그런 인간보다도 더 입체적이다.
여걸. 국가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린 여성이자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 혹은 권력의 종. 제 능력을 과신해 끝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만 모사꾼. 죽은 퐁파두르의 생애를 놓곤 그때도 엇갈렸다.
슬프다. 늙은 나도 살아있는데 한창때의 여인이 죽다니….
자존심 센, 지독하게 신랄하기까지 한 볼테르는 퐁파두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반면,
20년간 처녀였고, 15년간 매춘부였으며, 8년간은 ‘뚜쟁이’였던 여자. 여기서 잠들다.
이는 그녀가 죽을 당시 나돌던 묘비명 중 하나였다. 그녀에 대한 평가 수위는 이처럼 양쪽으로 극단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거와 현대의 친 퐁파두르파, 반 퐁파두르파 모두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평민에서 ‘메트레스 앙 티트르’로, 그러곤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 일. 이것만큼은 기적에 가까운 행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과 결과 모두 잘하고 잘 됐느냐에 대해선 또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참고 자료
인물세계사 : 마담 드 퐁파두르, 표정훈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이지은, 지안출판사
Madame de Pompadour, Nancy Mitford, Random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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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년 2월 25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가면무도회. 루이 15세는 다이애나 차림으로 온 잔 앙투아네트 15tv
푸아송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잔은 갸름한 얼굴과 여리여리한 뼈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흰 피부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걸었다. 보이지 않는 님프 무리를 시종으로 데려온 듯 당차게, 경쾌하게 움직이며 루이 15세를 향해 다가왔다. 거기다…
“어머나. 죄송해요.”
그녀는 루이 15세 앞에서 릴게임안전사이트
갑자기 손수건을 흘렸다. 이를 줍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슬쩍 드러나는 볼륨감. 루이 15세는 그 또한 얼떨결에 손수건을 향해 몸을 굽히며, 그녀의 앞자락 천이 가렸던 은밀한 부위를 엿볼 수 있었다.
루이 15세는 미인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사내였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여성의 그 신체 부위가 예쁜 모양이면 사족을 대신증권 주식
못 썼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눈앞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당시 루이 15세는 서른다섯 살, 잔은 스물넷이었다.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잔은 자신보다 먼저 손수건을 주워 건네는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뒤,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사라졌다. 이제 루이 15세는 애타는 마음으로외환송금
그녀를 찾아다니기에 여념 없었다.
장 마르크 나티에, 다이애나 분장을 한 퐁파두르 부인, 1746, 캔버스에 유채, 102x72cm, 베르사유 궁전
…드디어 사로잡았다.
돌아선 잔은 이쯤에서 곧장 표정을 바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껏 잔이 보인 모든 건 설계에 따른 행동이었다. 오직 한 목표. 루이 15세를 유혹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왕의 제1 애인, 이른바‘메트레스 앙 티트르’(maîtresse-en-titre)에 오르는 일. 잔은 이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시절 가장 세련된 초상화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6, 캔버스에 유채, 212x164cm, 알테 피나코테크
분홍색이 잘 어울리는 화사한 외모.
화가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잔의 초상화다. 과연 왕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뒤 조화와 리본,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꽃으로 수놓은 드레스, 그 틈에서도 빛을 발하는 진주 팔찌, 주변의 거울과 깃펜, 초와 편지지 등은 고급스러운 기운을 띄워준다.
청록색의 깊은 두 눈과 손에 쥔 책에서 영민함을, 긴장을 이어가는 척추를 통해선 뜻밖의 강인함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제목은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다.
다소 ‘민중적인’ 본명을 단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Poisson·프랑스어로 물고기란 뜻)의 초상화>라는 이름 말고, 보다 고급스러운 명칭이 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잔이 퐁파두르 지방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고, 일종의 ‘신분 세탁’에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즉, ‘무도회 작전’ 등으로 끝내 루이 15세를 유혹하고 말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잔도, 푸아송도 아닌 ‘마담 드 퐁파두르’로 불리게 된 그녀. 애초에 그녀는 왜 왕의 애인이 되고자 했을까. 압도적 영향력을 품은 후부터는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네 딸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언에…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스케치, 1750, 캔버스에 유채, 62.5x46cm, Waddesdon Manor
물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성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잔, 그러니까 퐁파두르는 원래 평민의 자식이었다.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은 별 볼 일 없는 사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친부(親父)가 맞는지를 놓곤 지금도 논란이다.
어머니 마들렌 데 라 모트의 직업은 당시 고급 매춘부, 코르티잔(Courtesan)이었다.
퐁파두르가 아홉 살이 된 어느 날, 어머니는 어린 딸과 함께 점술가를 찾았다. 앉자마자 들을 수 있던 말은…
네 딸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리라.
이런 예언이었다.
들뜬 모녀는 그쯤부터 왕의 눈에 들기 위한 장기 계획을 세웠다.
우선 퐁파두르는 문학과 철학, 예술과 수사학 등 각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천문학적 수업료는? 어머니의 당시 애인이었던 부유한 부르주아가 대신 냈다. 이 사내는 자기 조카와 퐁파두르를 결혼시켜 돈과 배경을 얻게 만들기도 했다.
가까운 미래, 설계대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가 눈이 맞자 조카에게 “때가 됐으니 아내를 포기하라(이혼하라)”고 설득한 이 또한 그였다. 이런 만큼, 학계에선 그를 퐁파두르의 진짜 친부로 추정키도 한다.
퐁파두르는 머리도 좋고, 근성도 있었다. 야망도 컸다. 그 크기는 스스로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녀는 수월히 예법과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 나날이 아름다워진 일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유명 코르티잔이 될 정도로 예쁜 어머니의 핏줄을 타고났으니.
천천히, 그러나 항상 앞으로.
퐁파두르는 이런 식으로 루이 15세에게 한 발씩 다가갔다. 운명의 여신도 함께 섰다. 다행히(?) 루이 15세는 정부(情婦)를 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한 귀족 가문의 네 자매와 돌아가며(!) 밀회를 즐길 지경이었다.
이런 만큼, 루이 15세는 폴란드 출신 왕비인 마리아 레슈친스카에 대한 지고지순한 마음도 없었다.
샤를 앙드레 반 루, 정원사로의 퐁파두르 부인, 1754~1755, 캔버스에 유채, 베르사유 궁전
퐁파두르가 루이 15세에게 다가갔을 때는, 때마침 그의 많은 첩 중 가장 사랑하던 이(샤토루 여공작)가 병으로 숨진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퐁파두르는 루이 15세가 때마침 적적함을 느낄 무렵을 잘 파고든 셈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퐁파두르는 가면무도회에서 루이 15세를 구워삶기에 성공한다.
퐁파두르는 그해 9월에 루이 15세가 기거하는 곳, 베르사유 궁전으로 몸을 옮길 수 있었다.
다만, 다이애나 분장의 시기, 무도회 당시 그녀가 보인 회심의 ‘계략’ 등 드라마틱한 상황을 놓곤 아직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 극적 묘사와 표현을 즐기는 프랑스인 특유의 기질상, 적지 않은 부분이 각색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이렇게 확실했다.
‘왕의 애인’이 될 수 있던 이유
작자미상,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36x27cm, 개인소장
퐁파두르는 곧‘메트레스 앙 티트르’가 되는 꿈도 이룬다.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 당시 프랑스 왕실의 관습을 짚어보자. ‘메트레스 앙 티트르’. 그녀가 그토록 바란 이 칭호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는 왕의 여러 정부 중에서도 한 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직이었다. 다른 정부들과 달리 왕에게 직접 조언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인사와 정책 수립, 심지어는 외교 전략을 놓고도 입김을 가할 수 있는, 상황에 따라선 왕비보다 더 존재감을 갖는 사실상의 ‘공인 애인’이었다.
그녀는 이 목표를 어떻게 일사천리로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눈치 빠른 퐁파두르가 루이 15세를 단박에 꿰뚫어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시 시몽 벨, 루이 15세(10대 시절), 1723, 캔버스에 유채, 베르사유 궁전
겉보기에 루이 15세는 멀쩡한 왕이었다. 그에게는 잘생긴 외모가 있었다. 여성 편력이 심하긴 했지만, 성품과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퐁파두르가 볼 때 루이 15세에게는, 왕의 자질 따위 없어 보였다. 기대기를 좋아하고, 결정은 버릇처럼 미뤘으며, 결과에 대해선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소심함과 심약함. 그를 둘러싼 껍질을 벗겼을 때 눈에 띄는 알맹이는 두 요소가 전부였다.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이었다.
퐁파두르는 그런 루이 15세를 있는 힘껏 구슬렸다.
그와 어떤 주제로도 말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했다. 대화가 끊길 때가 되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를 위해 직접 책을 읽어주고, 싫증을 잘 내는 성향에 맞춰선 계속해 새로운 연극과 공연을 기획했다. 특히나, 호색한인 그를 위해 밤에도 해달라는 건 다 해줬다고 한다.
퐁파두르는 그렇게 루이 15세가 점점 더 본인에게 의존하게끔 했다.
‘문화’를 꽃피운 여인
아니세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 마담 조프린의 살롱, 볼테르의 비극 낭독, 1812, 캔버스에 유채, 129.5x196cm, 말메종 성
‘여후작’이 된 퐁파두르는 궁 입성 직후부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문화였다. 이는 궁 내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다.
퐁파두르는 자신의 저택 등에서 이른바 ‘살롱’을 이끌었다. 살롱은 17~18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유행한 것이었다. 유력가인 주최자가 근거지로 지식인들을 초청한 후 문예를 주고받게 하는, 일종의 사교 모임이었다.
퐁파두르는 훗날 프랑스 최고 계몽사상가에 오르는 볼테르, 계몽주의의 또 다른 큰 물줄기인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 철학자를 살롱에 불렀다.
이들과 어울리며 백과전서(백과사전·Enciclopedie) 출판 작업에도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지식의 독점을 해금(解禁)하고, 온 국민이 ‘이성의 맛’을 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이 백과전서는 훗날 왕실을 뒤흔드는 프랑스 혁명 발발에 역할을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
퐁파두르는 이런 활동 덕에 보란 듯 지적인 인상을 챙겼다. ‘예쁘기만 하다’가 아닌, ‘예쁘기도 하다’는 인상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4, 파스텔, 36.5x28.1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찬란한 미모. 퐁파두르는 본인의 이러한 강점도 십분 활용했다.
그녀는 세련된 외모와 패션으로 당대 유행을 선도했다. 온 유럽의 귀족 여성들이 그녀의 모습을 따라 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요즘 말로 ‘품절 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퐁파두르의 기민한 감각은 유럽 예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줬다.
엄숙한 바로크 양식의 쇠퇴에 결정타를 주고, 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인로코코 화풍의 유행을 이끈 것. 직선 아닌 곡선, 강렬한 색채 아닌 파스텔 느낌의 부드러운 색조, 나른하고도 은밀한 표현…. 퐁파두르는 로코코 화풍의 이 기조를 따른 부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등을 열심히 후원했다.
예술에 대해선 돈이 있고, 관심이 있고, 감각도 있으니 웬만해선 좋은 영향을 미쳤다.
야망녀 퐁파두르는 어느덧 거물로 거듭났다. 이 또한, 계산대로였다.
‘7년 전쟁’ 후폭풍을 맞다
샤를 앙드레 반 루,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 1751, 캔버스에 유채, 271x193cm, 베르사유 궁전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의 모습은 늠름해보이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에게는 대군을 이끌 수 있는 열정도, 리더십도 없었다.
그러다 1755년. 퐁파두르가 서른네 살이 된 해.
퐁파두르는 영향력을 계속 이어갔다. 루이 15세와 함께 타국들 사이 외교 정책도 고심할 위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녀의 몰락 시작점이 되고 만다.
그해 오스트리아의 노련한 정치가였던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가 퐁파두르 쪽으로 접근했다. 그는 나날이 힘이 세지는 프로이센 견제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 어떻겠느냐는 취지의 제안을 했다.
퐁파두르는 고심 끝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나아가 러시아의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손을 맞잡았다. 이는 훗날 여성 셋이 머리를 맞댔다고 해 ‘3부인 동맹’이란 말로 불리기도 한다.
그 건은 유럽 외교사의 대사건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직전까지 철천지원수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동맹의 역전’이라는 숙어가 고유 명사로 굳을 지경이었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 1759, 캔버스에 유채, 91x68cm, 월리스 컬렉션
다소 감정이 섞인 결정이긴 했지만, 퐁파두르도 나름의 생각이 있기는 했다.
당시 국제 흐름을 보면 신흥 강국 프로이센은 충분히 견제 대상이 될 만했다. 다만, 결정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외교는 고차원적 종합 예술이다. 그녀가 대륙의 큰 그림을 보는 역량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결정권자인 루이 15세는 애초 별로 관심조차 없었다). 하필 그때 프로이센 국왕도 훗날 독일에서 ‘최고 군주’로 칭해질 만큼 운과 실력 다 좋았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이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 등 동맹군은 영국과 프로이센 등 군대와 맞서 7년 전쟁을 벌였다.
결과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밀려 사실상 패배. 프랑스 재정에 적색불이 들어왔다. 해외 식민지도 여럿 잃었다. 누구에게 비난 화살이 가겠는가. 결정권자인 무르고 무기력한 루이 15세, 그에게 결정적 조언을 했던 퐁파두르였다.
견디기에 쉽지 않은 ‘애인’의 무게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서재에 있는 퐁파두르 부인, 1749~1755, 파스텔, 175x128cm, 루브르 박물관
내 인생은 끔찍해요. 1분조차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어요. 접견, 행사, 출장, 언제나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하는 왕비와 그 자손들에 대한 의무….
퐁파두르의 글 중 일부
루이 15세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든 퐁파두르의 삶은 화려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숨겨진 대가도 컸다. 사실, 그게 이렇게 클 것이리라곤 그녀 또한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가장 까다로운 건 루이 15세의 마음을 ‘변함없이’ 사로잡는 일이었다.
툭하면 권태를 느끼는 그를 낮이고, 밤이고 만족시키는 걸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녀는 끝내 그의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그만큼 더 많은 장치를 끌어모아야 했다.
퐁파두르는 루이 15세를 위한 비상 대기조를 자처했다.
그녀는 루이 15세가 출석하는 연회 내지 식사도 빼지 않았다. 허리를 세운 채 몇 시간이고 있어야 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정말 곤욕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퐁파두르는 유명한 소식가, 루이 15세는 알아주는 대식가였다. 즉, 퐁파두르는 그런 자리에 가면 평소 먹는 양의 몇 배는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평민 출신인 그녀는 신분에 따른 견제와 조롱도 심하게 받았다. 이른바 반(反) 퐁파두르파의 귀족들은 그녀만 없으면 수군대기 일쑤였다. 적군인 프리드리히 2세는 대놓고 그녀를 ‘생선 집 아가씨’라 부르며 비웃기도 했다.
루이 미셸 반 루, 루이 15세,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227x184cm, 베르사유 궁전
날 때부터 허약했던 퐁파두르는 서른 무렵부터는 루이 15세와 잠자리도 갖지 않았다.
낮에는 살롱으로 또 한 번 연마한 지성을 앞세운다 치고, 밤에는 이제 ‘다른 방식’을 써야 했다. 퐁파두르는 예쁜 소녀를 모집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루이 15세의 밤 시중을 들게끔 유도했다고 한다.
이 밖에 자기 자리를 노리는 다른 젊고 예쁜 여성들에 대한 감시와 단속도…. 퐁파두르는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1분조차 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퐁파두르는 그렇게 영혼을 바친 덕에 루이 15세를 끝까지 휘어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민심은 험악해졌다. 따지고 보면 미숙한 지점이야 적지 않았다. 퐁파두르는 측근을 낙하산으로 곳곳에 꽂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런 그녀를 저격하는 노래가 유행가처럼 퍼질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살해 위협에도 시달렸다.
퐁파두르는 사치스럽다는 인상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가 주도한 살롱, 그녀를 중심으로 피어나는 유행이 여기에 더욱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7년 전쟁에 개입했다가 후폭풍을 매섭게 맞고 만 것이었다. 그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여걸? 모사꾼?…엇갈리는 평가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 퐁파두르 부인, 1763~1764, 캔버스에 유채, 217x157cm, 내셔널 갤러리. 생의 말년에 접어든 퐁파두르 부인은 병과 과로로 인해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떻게든 권력만은 쥐고 있던 퐁파두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결국 1764년에 허무하리만큼 무력하게 죽고 말았다. 7년 전쟁이 끝나고 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실상 퐁파두르에게 국정 지휘봉을 맡긴 루이 15세는 그녀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 이때 루이 15세는 딱 두 방울의 눈물만 흘렸다는 설도 있다. 눈물이 끊이질 않고 하염없이 흘러서 그랬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원래 입체적이고, 역사는 그런 인간보다도 더 입체적이다.
여걸. 국가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린 여성이자 탁월한 정치 감각의 소유자. 혹은 권력의 종. 제 능력을 과신해 끝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만 모사꾼. 죽은 퐁파두르의 생애를 놓곤 그때도 엇갈렸다.
슬프다. 늙은 나도 살아있는데 한창때의 여인이 죽다니….
자존심 센, 지독하게 신랄하기까지 한 볼테르는 퐁파두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반면,
20년간 처녀였고, 15년간 매춘부였으며, 8년간은 ‘뚜쟁이’였던 여자. 여기서 잠들다.
이는 그녀가 죽을 당시 나돌던 묘비명 중 하나였다. 그녀에 대한 평가 수위는 이처럼 양쪽으로 극단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거와 현대의 친 퐁파두르파, 반 퐁파두르파 모두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평민에서 ‘메트레스 앙 티트르’로, 그러곤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 일. 이것만큼은 기적에 가까운 행보라는 데는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 과정과 결과 모두 잘하고 잘 됐느냐에 대해선 또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참고 자료
인물세계사 : 마담 드 퐁파두르, 표정훈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이지은, 지안출판사
Madame de Pompadour, Nancy Mitford, Random 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