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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낭달웅동 작성일25-11-0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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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놀이터 ▨ 알라딘게임 ▨▽ 50.rcf928.top ┙지리산역사문화관 전경. 구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유병기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을 빛낸 많은 의병 가운데 구례 출신 유병기 의병장(1883~1910)이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유병기의 활동을 추적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김태원, 양상기 의진 구성이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앞서 살핀 권영회가 작전의 귀재였다면, 유병기는 조직의 귀재였다.
◆ 거병 위한 끊임없는 설득
유병기는 1883년 구례군 마산면 복곡면 강정리(현 용방면 죽정리 강정마을)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이후 마산면 청천리에서 거주했다. 그의 이명은 원집이었다. 일본군 심문조서에 '양반'이라고 나와 이것좀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인 송병선을 존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두 차례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리고, 그해 음력 12월 30일 음독 자결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1907년 5월 유병기가 송병선을 찾아갔다고 나와 있 e농협인터넷뱅킹 다. 이는 '폭도 거괴 체포의 건' 중 유병기의 심문 조서에 '융희 원년(1907) 5, 6월경 사사하는 송병선을 방문했다'고 한 자료를 참고한 듯 하나 송병선은 이보다 앞서 사망했기에 일본군이 조사과정에서 착오을 일으킨 듯 하다.




유병기가 태어난 것으로 은행별정기예금금리비교 알려진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일대. 과거 강정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송병선의 음독에 충격을 받은 유병기는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무렵부터 거병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는 간재 전우, 송사 기우만, 우담 곽종석 등을 찾아 거병을 상의했다고 한다. 이들 직장인인터넷대출 은 당대 지조 있고, 명망 있는 선비였다. 하지만 이들은 유병기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거병에는 이르지 못했다.

곽종석의 경우 의병 역량의 불충분하고,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는 없는 점, 일제에 오히려 침략을 명분을 준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대신 10년간 교육에 힘을 다하고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국민은행 청약저축 했다. 유병기는, 담양·장성·함평·보성·정읍·무주 등 여러 지역의 군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거의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병기가 거주하던 구례군 마산면 옛 청천리 터. 길 오른쪽에 세워진 표지석만이 이곳이 청천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유병기의 빛나는 공적은 관련 판결문과 심문조서, 일본군 전투 기록 등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심문조서에는 '유병기는 통감부를 무너뜨리고 일본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할 생각으로 김태원, 김율 등과 의논해 의병이라고 칭하는 비도를 모집해 일본군과 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다'고 언급돼 유병기의 거병 동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도 '한국의 시운이 없음을 좌시하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는 희망으로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수비병 혹은 헌병과 교전했다'라고 해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은 결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유병기의 항전 사실을 기록한 일본 자료


◆ '거괴' 김태원과 훌륭한 전과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며 의병전쟁이 본격화됐다. 나주에서 김태원·김율 형제가 거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병기는 김태원을 찾았다. 이후 백낙구·조기채와도 합류해 거의를 논의했다. 유병기의 심문조서에는 유병기가 김태원에게 거병할 것을 먼저 제의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태원을 상장으로, 김율을 중군장으로, 백낙구를 후군장으로, 조기채를 기포장으로, 유병기는 참모장이 됐다. 이렇게 해 이른바 김태원 의병부대가 결성됐다. 유병기를 조직의 귀재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김태원도 작전 수행 중 유병기의 판단을 존중할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융희 2년(1908년) 8월 김태원이란 자가 수괴가 돼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면서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라는 명목으로 도당 약 6백 명을 모아 총 약 4백 정을 수집하고 이 일단의 도당과 함께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전남 영광, 함평, 장성, 나주, 광주, 창평, 담양, 동복 등 각 군내에 제멋대로 다녀 위 수괴 김태원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고 적혀 있다. 유병기가 의진을 결성하고자 전남 곳곳을 휘젓고 다녔음이 드러난다.
김태원 의진 결성은 사실상 유병기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군수품은 1장의 통문으로 쉽게 조달할 수 있을 정도로 민중의 신망도 높았다.

김태원, 유병기 의진은 1907년 9월 중순 흥덕군 사진포에 있던 일본인 가옥 3동 소각, 12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 3명 사살 등의 성과를 거뒀다. 1908년 2월 무동촌 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쌍안경 1점, 단검 1점, 일본군도 1점을 노획했다. 무동촌 전투는 엄청난 전과였다. 다만 김태원이 위의 전리품을 집에 가져다 놓은 것을 아들 경천이 가지고 놀다 일본군에 끌려가 하루 종일 고문받은 끝에 평생 반신 불구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병기·양상기의 교수형을 확정한 고등법원 형사부 판결문


◆ 양상기와 불태운 마지막 불꽃
장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유병기 자신도 우측 어깨와 우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영광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여 일본군 기병 중위 등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광주와 나주의 경계인 용진산, 순창 산막 등 도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막 전투에서는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했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에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기포장 조기채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유병기 자신도 왼쪽 어깨와 좌복부에 총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부상을 입은 유병기는 다른 의병 부대로 합류해 활약을 이어갔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동 2년(1908년) 10월(음력 9월) 경에 전기 양상기가 다중을 모아 친히 수괴로 돼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고 총을 휴대한 도당 약 70명과 함께 동년 3월(음력 2월 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장성·담양·광주·창평 등 각 군내에 횡행해 위 수괴 양상기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고 적혀있어 유병기가 양상기 부대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준다.이후로도 유병기는 양상기와 함께 의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의 활약상을 다음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제6. 피고 양명은 동 3년(1909년) 3월 2일 밤(음력 2월 1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동면 남산리로 난입해 동리에 거주하는 정준필 및 국사윤을 붙들고 동군 두면 연동으로 연행해 동소에서 위 양인에 대해 돈 1만 냥을 지출치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해 약 3~4일 후에 동소에서 그 마을의 이장 남준여의 손을 거쳐서 위 양인에게 각각 돈 2백 냥씩 겁취했고,
제7. 피고 2인은 동년 3월 5일(음 2월 14일)밤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을 휴대한 도당 약 50여 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강정리로 난입해 그 마을 부자 수명을 붙들어 발포 위협한 뒤 한충여에게 쇠 돈 3냥 외에 1점과, 김도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1점과, 한내진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겁취했고,

제8.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11일(음력 윤 2월 2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남산리로 난입해 그 마을의 이장 김석필에 대해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협박해 동인에게 돈 1백 50냥을 겁취했고,(이하 생략)'




유병기 체포를 보고한 일본 경찰 문서


한편 양상기와 연합의진을 구성했던 유병기는, 양상기와 부대 운영에 이견이 있어 의진을 나와 고향 구례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중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이후 광주로 이송돼 양상기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 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됐다. 1910년 6월 16일이었다. 재판에 관여한 판사가 5명인데, 재판장을 포함해 3명이 일본인, 2명이 한국인이었다. 1909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후 가혹한 처분이 내려진 결과였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89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이름은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 구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유병기가 태어난 강정리와 거주하던 청천리는 모두 마을이 없어진 상태다. 특히 청천리는 가구수가 70호 정도 되는 마을이었으나 여순사건 이후 많은 주민들이 행방불명되고 마을 전체가 방화로 불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