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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 기자]

중후한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Albergue Peregrinos Real Colegiata de Roncesvalles)는 밖에서 봤을 때 천국의 모습이었다. 아, 저 건물 안으로만 들어가면 걷기도 끝이고 비와 추위도 끝이고 밥도 먹을 수 있다. 눈앞에 실존하는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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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레네를 넘어 도착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 김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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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은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체크인 전의 알베르게는 수재민 대피소였다. 비에 젖은 여행자들이 비슷한 시각에 몰려드는 바람에 체크인 전쟁 중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여행자들 사이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스태프들이 교통정리 하고 있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지텔프고사장 한국인 네 사람이 우리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보다 나이가 10년은 많아 보이는 연배였으니 70대쯤으로 짐작되었다. 알베르게 체크인을 위해서 사람마다 개인 정보를 담은 큐알코드가 필요한데 네 명 중 예약자 한 명만 그 큐알코드를 갖고 있어서 체크인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당장 입력하면 되는데 보금자리론 갈아타기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어 우선 당황한 것 같았다. 상황은 알겠지만 내 코가 석자다. 방법만 짧게 설명해 드렸고 실질적으로 도와드리지 못했다. 우리 일행 네 사람은 큐알코드를 각자 생성해서 왔기 때문에 순조롭게 체크인했다.
북새통을 뚫고 침대를 배정받고 나서야 아까 그분들이 생각났다. 이미 한국 여행사 가이드분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여 영세민 자 가이드가 자기 고객 챙기기도 바쁜 중에 그분들의 개인 데이터를 하나씩 입력해주고 있었다. 어디든 홍반장은 있는 법이다.

하루 내내 그렇게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빗물과 흙탕물로 질퍽한 운동화를 벗는 순간 최대의 괴로움에서 마침내 발이 '해방'되었다. 신이 나의 기도 1번을 들어주시던 순간이었다. 이곳이 천국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  빗길을 종일 통과해오느라 양말 속까지 젖은 신발


ⓒ 김상희




신발을 씻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진흙 투성이었던 내 운동화가 깨끗하게 씻겨져 있는 게 아닌가. 역시 천국은 다르다. 남편이 자기 신발 씻으려고 왔다가 내 것까지 같이 씻었다고 했다. 그런데 신발 깔창이 없다. 운동화를 벗어 둘 때 깔창을 운동화 위에 얹어 두었는데 없어진 것이다. 신발 씻어준 고마움은 어느새 깔창 안 챙긴 원망으로 바뀌었다.










▲  오늘을 걸어낸 순례자들의 신발


ⓒ 김상희




다음날 아침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도 남는 깔창은 없었다.

"그래도 신발을 안 잃어버린 게 어디야. 그깟 깔창 한 개쯤 잃어버려도 아무 문제없지."
독자 중 누구라도 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정체는 뭐냐고 물으신다면? 이실직고하면 난 깔창 부자이다. 사실, 신고 있던 신발의 깔창은 두 장이었다. 원래 깔창에 여분 깔창을 덧대어 신고 다녔다. 그게 다가 아니다. 깔창이 해질 걸 대비해 새 깔창을 배낭 깊숙한 곳에 한 장 더 넣어 왔다는 사실!
배낭에서 새 깔창 한 장을 꺼내 운동화에 깔았다. 내 신발은 다시 깔창 두 장의 폭신한 신발이 되었고 신발 깔창 한 개의 무게만큼 내 배낭은 더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