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바다와 기암괴석, 해안산책로가 어우러진 동해안 대표 관광지, 삼척 장호항의 풍경.


첫 삼척 여행이었다. 강원도 강릉, 묵호는 종종 찾았지만 이상하게 삼척만은 늘 지나쳤다. 지도 위에서는 가까웠지만, 마음속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던 삼척. 이번엔 더 늦기 전에 1박 2일 여정을 떠났다.
차를 몰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차창 너머 바다는 점점 푸른빛을 더했고, 바닷바람 속 동해안 특유의 바다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부드럽게 굽이치며, 달리는 내내 바다와 함께 였다.
삼척에는 자박자박 걷기 좋은 길이 많았고, 먹거리와 즐길 거리도 제법 풍성했다. 도시 안에서 이동거리가 길지 않아 한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밤에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텐트 속에서 잠드는 호사를 누렸다.



준경묘의 대왕소나무 군락지. 줄기가 굵고 높이가 장대한 금강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다.


삼척 준경묘와 금강소나무 숲
여행의 첫 발걸음은 숲에서 시작했다. 삼척 준경묘는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두타산 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길게 뻗어 내려오는 길목이자, 예 로부터 명당으로 꼽히던 터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로, 원래 '활기리 명당'이라 불렸다. 조선 개국 후에는 국가에서 제향을 올리는 능묘로 지정되었다. 준경묘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왕실 선대의 능묘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 묘역에는 전해 내려오는 흥미로운 설화가 있다. 장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후손들은 소 100마리를 잡아 장례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흰 소 한 마리와 귀리짚으로 관을 덮으라는 계시를 받아, 소 백 마리 대신 흰 소 한 마리를 잡고, 금관 대신 귀리짚을 사용했다 하여 '백우금관白牛衾棺' 설화로 불린다. 이는 검소함과 겸손을 상징하며, 묘역의 품격을 더욱 높여 주는 이야기로 남았다.
준경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장군의 부인, 삼척 이씨의 무덤인 영경묘가 있다. 두 묘는 함께 조선을 세운 이성계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며, 선조에 대한 공경과 역사 의식을 전하는 공간이다.
이곳 금강소나무는 문화재 복원에 귀하게 쓰였다. 경복궁 중수 때도, 그리고 2008년 국보 1호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 때도 준경묘 일대에서 자란 금강소나무 20그루가 베어졌다. 벌목 전에는 고유제와 산신제를 올려 나무의 영혼을 달래고, '어명'이라는 구호로 궁궐 재목으로 쓰이는 이유를 고하고 원혼을 위로했다.



평평한 데크길로 이어져 있는 덕봉산의 해안둘레길을 걸으면 파도와 맞닿은 기암괴석 사이로 바닷물이 부서지고, 해풍이 얼굴을 스친다.


이 숲의 소나무는 곧고 뒤틀림이 거의 없으며, 높이 30m에 이르는 나무가 많다. 거북등처럼 단단히 갈라진 수피는 세월의 강인함을 보여 준다. 특히 곧은 줄기와 높은 가지를 가진 갖춘 '미인송'이 많아, 사람처럼 나무에도 미인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주차장에서 준경묘까지는 약 2km. 계단길이 이어지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천천히 걸으면 부담이 없다. 준경묘를 둘러본 뒤, 묘 뒤편으로 난 금강소나무 산책로로 향했다. 흙길은 폭신했고,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포근한 흙냄새가 났다. 숲의 호흡에 맞추듯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불면 솔향이 은은하게 번졌고, 잠시 멈춰 서면 다시 깊고 진한 향이 코끝을 감쌌다. 숲속은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어 걸음마다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졌다.



울창한 숲길 속, 고요히 자리한 준경묘 입구 풍경.


오르막을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대왕소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줄기가 굵고 높이가 장대한 금강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사람 키의 수십 배에 달하는 기운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칠 때마다 솔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풍성한 솔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부드럽게 어깨를 덮어주었다. 흙 위를 밟는 발소리마저 숲의 고요에 스며들었다. 숲속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 이런 숲은 우리를 다독이며 건강한 위안을 준다.
바다를 품은 산, 덕봉산
숲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이번엔 바다로 향했다. 삼척의 맹방해변과 덕산해변 사이, 해발 54m의 낮은 봉우리가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름은 덕봉산德峰山. 높이는 낮지만 정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웬만한 산도 부럽지 않다. 파도와 바람이 벼려낸 해안선, 그 위로 부드럽게 얹힌 마을과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덕봉산은 한때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53년간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2021년 군부대 철책이 철거되면서 처음으로 그 비경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곳이라 길과 풍경은 때 묻지 않은 신선함을 품고 있다.
탐방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대나무 숲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는 A코스(317m)와, 해안을 따라 기암괴석을 감상하는 B코스(626m)다. 두 코스를 합해도 1km 남짓, 난이도는 '하하'. 남녀노소 누구나 천천히 걸으며 즐길 수 있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오르면 만나는 덕봉산 정상 전망대.


A코스는 대나무가 하늘을 덮어 만든 그늘길을 따라가는 산책로다. '천국의 계단'이라 불리는 경사진 계단을 오르면, 사방이 360도로 열리는 정상 전망대가 기다린다. 앞쪽으로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망망대해, 좌우로는 맹방해변과 덕산해변, 뒤로는 덕산 마을이 펼쳐진다. 날씨가 맑으면 멀리 울릉도의 실루엣까지 시야에 걸린다.
B코스는 평평한 데크길로 이어진 해안 둘레길이다. 파도와 맞닿은 기암괴석 사이로 바닷물이 부서지고, 해풍이 얼굴을 스친다.
해변에 놓인 섭다리를 건너며 탐방이 시작되는데,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는 순간 마치 섬으로 들어서는 듯 설렘이 몰려온다. 정상에 서면 발아래로 두 해변이 팔을 벌린 듯 나란히 누워 있고, 바다는 끝없이 펼쳐진다. 대나무 숲의 바스락거림, 섭다리의 아슬함, 해풍과 파도 소리, 그리고 정상에서 바라본 내륙과 바다의 대조. 모든 순간이 마음을 흔들었다.
덕산해변과 덕봉산을 잇는 외나무다리는 S자 곡선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사진 촬영 명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서면, 다리와 바다, 그리고 덕봉산이 한 프레임에 담겨 여행의 한 장면을 완성해 준다.



절벽과 숲, 바다 풍광을 한눈에 담는 초곡 용굴 촛대바위길.


바다 위를 걷는 길, 초곡 용굴 촛대바위길
덕봉산에서 내려와 차로 잠시 달리면, 파도와 절벽이 만들어낸 또 다른 길이 기다린다. 삼척 초곡항 인근, 동해와 맞닿은 절벽 사이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초곡 용굴 촛대바위길이다. 총 길이 660m로, 512m의 데크길과 56m의 출렁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부분은 유리로 되어 있어 발아래로 파도치는 바다를 볼 수 있다.
한때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제한되었던 이곳은 2022년 7월 일반에 개방되었다. 데크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과 숲, 왼편으로는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다. 촛대바위, 거북바위, 피라미드바위 등 이름을 지닌 기암괴석들은 파도와 바람이 만든 조각품 같았다. 발밑으로 '쏴~아'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도시의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든다.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 길은 단순한 해안 산책로이면서, 파도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시간이었다.



초곡 용굴 촛대바위길 포토스팟, 용 프레임 너머로 동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의 입구, 임원항
해안 풍경의 여운을 안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찾은 임원항은 활기가 넘쳤다. 임원항은 오징어와 대게, 생선회가 유명한 삼척의 대표 어항이다. 아침 일찍 찾으면 어선들이 항구로 들어오는 장면을 볼 수 있고, 수협 위판장에서 경매 입찰 과정도 구경할 수 있다.
임원항 회센터에는 막 잡아온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했다. 다양한 해산물을 착한 가격에 맛볼 수 있고, 항구 주변에는 작은 카페와 횟집들이 모여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을 즐기기에도 좋았다. 활기와 바다 내음이 어우러진 이곳에서의 한 끼는, 삼척 바다의 진한 맛과 향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을 품은 장호비치캠핑장 전경.


바다와 맞닿은 쉼, 장호비치캠핑장
해가 기울 즈음 장호비치캠핑장에 도착했다. 소나무숲 그늘 아래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이지만, 그 매력은 숲에만 있지 않았다. 바로 앞이 탁 트인 바다라, 하루 종일 바다멍 하기에 그만이었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하늘과 바다의 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시간의 흐름마저 느슨해졌다.
근처에 임원항이 있어 먹거리를 찾기 좋고, 조금만 걸으면 삼척해상케이블카도 이용할 수 있다. 밤이 되자 파도 소리는 한층 고요하고 깊어졌다. 예약은 홈페이지(장호비치캠핑장 http://www.janghocamping.kr/)를 이용하면 된다.



제주바다의 느낌이 물씬 나는 삼척 부남해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장소이기도하다.


에메랄드빛 고요와 파도의 숨결, 부남해변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아침에는 캠핑장에서 가까운 부남해변으로 갔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바다였다. 고운 모래와 완만한 경사의 백사장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물빛은 맑아 발끝이 잠긴 물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해변 양쪽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깎아 만든 바위들이 서 있었다. 거친 날씨와 시간이 빚어낸 이 바위들은 마치 바다를 지키는 수문장 같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제주 바다의 풍경이 겹쳐졌다. 햇빛에 따라 에메랄드빛에서 짙푸른색으로 변하며 반짝이는 바다는 영롱했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도 바다는 힘을 숨기지 않았다. 파도는 때로 세차게 밀려와 발목을 잡을 듯 몰아쳤고, 그 순간의 긴장감이 오히려 바다를 더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부남해변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곳으로 유명해졌다. 카메라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이곳의 매력은 깊고 강렬했다.



삼척여행개념도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