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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울 한복판에 경복궁을 가로막고 서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전격 철거됐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일제 잔재 청산의 시금석으로 여겼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당시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던 난 소수일지언정 반대편에 섰다. 논거는 단순했다. 멀쩡한 건물을 허무는 건 세금 낭비일뿐더러 건물 하나 없앤다고 일제의 잔재가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 일제의 잔재는 '외양의 문물'이 아닌 '내면의 문화'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철거에 반대하며, '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이고, 치욕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라는 구호를 외 현대중공업 쳤다. 조선총독부야말로 식민지의 참상을 반면교사 삼을 수 있는 '역사교육 자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 잔재의 근본적인 청산을 은폐하려는 술책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다면 수명이 다한 역사적 건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나와 함께 반대편에 섰던 이들 사이에서 이어진 질문이었다. 대다수는 '철거하는 게 맞다' 자동차담보대출은 SK다이렉트론 고 답했다. 건물이 세워진 뒤 세월이 흘러 무너지는 과정 또한 역사의 순리라고 입을 모았다. 수명이 다한 건물을 '연명 치료'하는 건, 역사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곧, 조선총독부의 철거와 보존은 역사적 의미가 아닌 건물의 수명을 기준 삼아야 한다는 게 다수의 결론이었다. 건물이 품은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밖에 월복리계산법 없다는 논리로 매조지었다. 끝내 좌절되긴 했어도, 공간과 기억에 대한 성찰을 일깨운 나름의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기억을 위한 보존, 그러나 현실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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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적십자 병원 안뜰에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전시해놓았다. 5.18 사적 제11호로 지정된 병원 건물은 31일까지 임시 개방한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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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게 3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 건, 이달 31일까지 임시 개방하는 옛 광주 적십자 병원(5.18민주화운동 사적 제11호)에 낙서처럼 적힌 이 글귀를 보고서다. 임시 개방 소식에 전국 각지의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응급실과 진찰실 등 건물 내부와 안뜰을 둘러볼 수 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기억을 위해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5.18이 후세에 건네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금언과 맞물려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논리는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십분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1965년에 세워진 건물은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롭다.
적십자 병원은 5.18 당시 계엄군에 의해 부상당한 시민들을 치료하고, 숨진 이들의 주검을 임시 안치했던 곳이다. 이후 한 지방대의 부속병원으로 쓰이다 지난 2014년 문을 닫은 뒤 지금껏 방치되어 있다. 5.18 사적지로 지정되고 광주광역시가 매입해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병원 안뜰에는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향후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시민에게 물은 뒤 답한 내용을 출력해 가지런히 걸어놓았다. 세대와 성별에 따라 답변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활용 방안을 두고 방문객들과 시민의 관심을 유도하려는,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다.

5.18 당시의 '정체성'에 맞도록 새 의료 시설을 짓자는 의견도 있고, 이미 슬럼화한 상황에서 쇼핑몰이나 오피스텔 등으로 개발하자는 주장도 있다. 5.18의 정신을 구현하는 교육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내용도 보인다. 이들 대부분 건물 철거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  5.18 사적 제27호로 지정된 들불야학터. 현재 당시 건물의 벽채 일부만 보존되어 있다. 왼쪽 뒤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 철거를 앞둔 광천동 시민아파트다. 그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이 서 있다.


ⓒ 서부원




5.18 당시 시민 항쟁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들불야학이 자리한 광천동 시민아파트도 옛 적십자 병원과 비슷한 처지다. 1969년에 세워진 건물로,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아파트를 비롯해 인근 지역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고, 주민들 모두 이주한 상태다.

출입이 제한된 구역을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고, 길목마다 출입을 막는 가로줄이 쳐져 있다. 마치 전쟁 후 폐허가 된 마을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70~80년대 배경의 드라마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 새로 깔린 아스팔트 도로가 그 배경과 대비되어 더욱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만간 통째로 사라질 풍경이다. 재개발구역의 한가운데 자리한 아파트도 같은 운명이다. 철거를 반대하는 여론 탓인지, 최근 아파트 3개 동 중 한 동을 존치해 역사관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렇게 되면, 역사관은 고층빌딩 숲 사이 '외딴섬'처럼 자리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증언하는 건물을 경제성장과 사유재산권 운운하며 마구잡이로 허무는 건, 단언컨대 범죄 행위다. 그렇다고 45년이나 지난 5.18 당시의 낡고 위험한 건물을 그대로 존치하는 게 능사일 리도 없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기억을 위한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한 이유다.
전남대가 보여준 해법
그 해답을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찾았다. 전남대는 5.18이 발화한 곳으로, 교문에 '사적 제1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자, 전남대생들이 교문에 모여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5.18의 대학'답게 전남대 교정 곳곳엔 기억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세월이 흘러 공간은 변형되었지만, 당시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5.18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 붙어있고, 누구든 어색해하지 않고 그렇게 부른다.

담벼락을 허물고 교문 옆에 조성한 숲은 '5.18 기념 공원'으로 공식 명명됐다. 교문을 지나 왼편 비탈진 곳은 5.18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으로서 '민족 민주 대성회'를 이끌었던 박관현 열사를 기리는 '박관현 언덕'이다. 기념비 앞에 놓인 국화꽃이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  '박관현 언덕'에서 내려다 본 전남대 교문의 모습. 교문 입구에는 교정의 5.18 기억 공간을 안내하고 해설하는 총학생회의 자원봉사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5월의 주말엔 상주한다고 한다.


ⓒ 서부원












▲  사회과학대학 내에 만들어진 '윤상원의 방' 모습. 후배들이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할 수 있도록 휴게실처럼 꾸며놓은 기념관이다. 그 옆 복도의 이름도 '윤상원의 길'이다.


ⓒ 서부원




그 길로 100미터쯤 오르면 '윤상원의 숲'을 만난다. 그가 졸업한 사회과학대학의 앞뜰에 그의 흉상을 세우고, 양옆으로 5.18 당시 시민들이 남긴 말들을 빗돌에 새겨놓았다. 대학 건물 안에는 '윤상원의 방'을 휴게실처럼 조성해 그의 숭고한 희생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곳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김남주의 뜰'이 있다. 유신 독재정권 시절 시로써 권력에 맞선 '혁명 전사' 김남주 시인을 기리는 공간이다. 그의 대표작인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구절을 새겨놓은 대형 동판이 눈부시다. 그 옆 인문대학 건물엔 '김남주 홀'도 조성되어 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문대학의 도로 건너편에는 '교육지표 사건 기념비'가 자리한다. 1978년 전남대 교수 11명이 학원 민주화와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박정희 정권에 맞선 사건이다. 당대 지식인들의 집단적 저항으로 유신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덕을 내려가면 전남대 교정의 한복판인 광장을 만난다. 옛 본관 건물과 학생회관, 도서관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이름은 '5.18 광장'이다. 원래 이곳엔 '봉지(鳳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을 메워 광장을 조성했는데, 이조차 5.18을 기억하자는 취지를 담아 명명한 것이다.

현재 5.18 당시 전남대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옛 대학 본관과 인문대학 정도가 고작이다. 심지어 '사적 제1호'로 지정된 교문조차 옛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교정에 들어서면 누구든 5.18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새롭게 조성한 공간마다 5.18의 기억을 입힌 덕분이다.










▲  학생회관 앞에는 노태우 정권에 저항하며 분신한 박승희 열사를 기리는 '박승희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앞에서 대학생 단체 방문객들이 총학생회 자원봉사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서부원




5.18 제45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전남대 교정엔 5.18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대학생 단체 방문객이 많았고, 가족 단위로 찾아온 이들도 눈에 띄었다. 여행사 깃발을 든 외국인 단체도 만났고, 앳된 초등학생들도 선생님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5.18을 되뇌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고,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는 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공간을 재구성하면 된다. 전남대가 이를 증명한다. 부디 옛 적십자 병원과 광천동 시민아파트가 5.18의 기억을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