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열기를 되찾은 밤, 비아맥스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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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수랑다솔 작성일25-11-1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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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 불규칙한 생활습관, 만성질환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남성 성기능 장애ED, Erectile Dysfunction를 겪는 이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신체적인 불편을 넘어, 개인의 심리적 안정과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성적 건강은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사랑의 열기를 회복하기 위해 찾는 것이 바로 x27비아맥스Viamaxx27다.
비아맥스는 남성 성기능 장애를 해결하고 성생활의 질을 높이기 위해 개발된 건강기능식품으로, 천연 성분을 기반으로 한 제품이다. 이 제품은 단순히 발기 기능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 체력 증진과 전반적인 남성 건강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아맥스를 복용한 많은 남성들이 다시 사랑의 열기를 느끼며,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
비아맥스의 성분과 작용 원리
비아맥스는 천연 허브와 영양소를 주성분으로 하여, 남성의 성기능을 자연스럽게 지원한다. 주요 성분으로는 마카, 인삼, 은행잎 추출물, L아르기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성분들은 혈류를 개선하고, 체력을 증진시키며,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카: 페루에서 자생하는 뿌리 식물로, 체력 증진과 성기능 개선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삼: 전통적으로 남성 건강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 온 허브로, 에너지 수준을 높이고 피로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은행잎 추출물: 혈액 순환을 개선하여 발기 기능을 지원한다.
L아르기닌: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혈관을 확장시켜 음경으로의 혈류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성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아맥스는 남성의 성기능을 전반적으로 지원하고, 체력과 에너지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비아맥스 복용 후 기대할 수 있는 변화
발기 기능의 개선비아맥스의 가장 기본적인 효과는 발기 기능의 개선이다. 성기능 장애로 인해 발기가 어려웠던 남성들이 비아맥스를 복용한 후, 다시 자연스러운 발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를 넘어, 심리적인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체력과 에너지 수준의 향상비아맥스는 체력과 에너지 수준을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피로를 줄이고, 전반적인 활력을 증진시켜 성생활을 더욱 즐겁고 활기차게 만든다.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감 회복성기능 장애는 단순히 신체적인 문제를 넘어, 심리적인 부담감과 좌절감을 유발할 수 있다. 비아맥스를 복용한 후 발기 기능이 개선되면, 이러한 심리적인 부담감이 해소되고 자신감이 회복된다. 이는 개인의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관계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관계의 질 향상성생활은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성기능 장애로 인해 성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남성들이 비아맥스를 복용한 후, 다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회복할 수 있게 되면, 관계의 질도 자연스럽게 향상된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만족을 넘어, 정서적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한다.
비아맥스 복용 시 주의사항
비아맥스는 천연 성분을 기반으로 한 건강기능식품이지만, 복용 시 주의해야 할 사항들도 있다. 먼저, 기존에 복용 중인 약물이 있거나, 특정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의사와 상담 후 복용해야 한다. 또한, 비아맥스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꾸준히 복용하여 체내에 축적되는 효과를 기대하는 제품이므로, 지속적인 복용이 필요하다.
사랑의 열기를 되찾는 길
비아맥스는 성기능 장애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제품이다. 발기 기능을 개선하고, 체력과 에너지 수준을 높이며, 심리적인 안정감과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비아맥스는 건강기능식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약물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규칙적인 운동, 건강한 식습관, 스트레스 관리 등 종합적인 건강 관리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기능 장애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거나 숨겨야 할 문제가 아니다. 현대 의학과 건강기능식품의 발전으로 이제는 효과적인 해결책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비아맥스는 그 중 하나다. 성기능 장애로 인해 사랑의 열기를 잃어버렸다면, 비아맥스가 그 열기를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성생활은 개인의 행복과 관계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임을 기억하며, 적절한 치료와 관리로 다시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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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
‘106세 스승’ 김형석(오른쪽) 철학자가 ‘94세 제자’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과 포즈를 취하며 “누가 젊어 보여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가 “비슷하지요?”라며 파안대소하자 제자도 환하게 웃었다. 곽성호 기자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스위스그랜드 호텔 커피숍. 균형 잡힌 체격의 노신사가 1층 로비에서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왔다.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 올해 우리 나이로 94세인데, 바른 걸음걸이가 건강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오셨네요.” “선생님 뵙는데, 릴게임몰메가 당연히 일찍 와야지요.”
그가 언급한 선생님은 106세의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조 고문은 중앙고교 재학 때 당시 교사로 재직했던 김 교수로부터 철학, 윤리를 배웠다.
“선생님께서 ‘겸손해라’ ‘최선을 다해라’ 당부하신 말씀을 평생 지키고자 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6·25전쟁이 나서 졸업을 못한 채 선생님과 릴게임다운로드 헤어졌어요. 그 이후 뵙지 못했으나 늘 그리웠습니다. 더 늦기 전에 뵙고 싶어요.”
현재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조 고문은 최근 귀국해 서울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다. 그는 김 교수를 만난 적이 있는 문화일보 기자에게 은사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청했다.
김 교수는 조 고문의 만남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19 바다이야기부활 32년생 제자라니…, 하하.”
이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김 교수가 나타나자, 조 고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김 교수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를 껴안았다.
“내가 오면서 생각하니 우리 둘이 200세가 되더군요.”
김 교수가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조 고문도 함께 웃었다.
릴게임가입머니“우리 나이로 106세이신데,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숫자가 아니지요. 그 세월 동안 선생님께서 우리가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고, 그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뤄진 것이지요.”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1시간 반 동안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김 교수는 몸을 비스듬히 젖힌 자세였고, 조 고문은 의자에 엉덩이만 걸 릴게임야마토 치고 시종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김 교수는 여전히 유머가 넘쳤다. 두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 “어때요? 누가 젊어 보여요? 비슷하지요?”라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조 고문도 위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기자가 커피를 시키겠다고 하자, “나는 차 말고 돈으로 줘요”라며 싱긋 웃었다.
김형석 교수가 세계 최고령 저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책 ‘백년의 지혜’를 조중건 고문에게 주며 서명한 내용.
두 사람은 중앙고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에 대한 추억을 공유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 다음 날 학교장을 찾아갔어요. ‘학교 예금을 은행에서 찾아 교직원에게 3개월씩 월급을 먼저 지급하면 좋겠다’라고 제안했지요. 내 나이 30세 때이니 겁이 없었던 것인데, 창립자인 인촌 선생이 그걸 받아줬어요.”
조 고문은 인촌이 교정 잔디밭의 잡초를 직접 뽑고 화장실에서 오줌을 손수 퍼와 물에 타서 뿌리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중앙고 교사 시절에 자신이 했던 결심을 되돌아봤다.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나라다운 나라,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
“내가 해방 직후 고향(평안남도 대동)에서 동네 선배 김성주를 만났잖아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공산당 행동대원 같았지요. 그해 10월에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열렸는데,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둔갑해 나타났어요. 소련 군정이 가짜를 내세운 걸 알게 됐지요. 여기선 나라다운 나라를 볼 수 없겠구나, 싶어서 남으로 온 거예요.”
조 고문은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지하실에 3개월 동안 숨어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누군가의 밀고로 인민군에 붙잡혀 죽는구나 싶었는데, 당시 좌익이었던 친구가 나타나 ‘중건아, 빨리 도망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살아남았어요.”
제자는 곡진한 어투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전쟁 때 자진 입대해서 육군 통역장교 등으로 근무한 것, 1955년 제대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한 것, 귀국 후 형(고 조중훈 전 대한항공 회장)이 창업한 한진상사에 합류한 것 등. 스승은 ‘응, 응…’ 하며 일일이 맞장구를 쳐주고 가끔 질문할 때는 존대어 어미를 썼다.
“형님은 몇 살 위예요?”
“열두 살 위입니다. 중간에 누님 넷이 있지요. 형님과 저는 참 배짱이 맞았습니다.”
조 고문은 베트남전에서 미군 물자를 운송하며 ‘외화 획득’을 했던 걸 되돌아봤다. 그는 민간인으로 전쟁터에 가서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능통한 영어와 타고난 기지로 미군의 신뢰를 얻어냈다(그의 친구인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대사는 어느 글에서 그에 대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의 특성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월남서 번 돈으로 대한항공을 인수한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1948년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조 브라더스가 맡아 달라’고 했어요. 당신이 죽기 전에 국적기를 꼭 타보고 싶다며 간곡히 청했지요.”
조 고문은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1952년 광주 포병학교에 근무할 때 교육을 받으러 온 박정희 대령을 처음 만났고, 그 이듬해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포병학교에서 한국군 장교들을 가르칠 때 그를 또 만났다. 그런 인연으로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영어 이름 ‘찰리(Charlie)’로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한 항공사를 ‘조 브라더스’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의 무분별한 압력 탓에 어려운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기업 하기 힘들었어요.”
제자는 스승에게 짐짓 하소연조로 말했다. 스승은 “대한항공과 같은 기업들을 우리 정치가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제자를 어루만졌다.
대한항공 부사장, 한일개발 사장, 대한항공 사장을 거쳐서 부회장을 지낸 후 1990년대 말에 하와이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조 고문은 “조카들이 대학 졸업했으니 부딪치지 않으려 떠난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내가 대한항공을 930여 번 탔더라”며 “국내선도 꼭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일을 돕고 있는 이종옥(80·아가페복지법인 이사장) 씨는 “강연을 다니시며 그 많은 집필 활동을 하시는 걸 보며 늘 경탄한다”라고 했다.
조 고문은 “선생님 집필을 지원하는 뜻으로 약소하나마 1000만 원을 드리고 싶다”라고 했다. 이 씨는 고마움을 표하며 김 교수가 이런 후원금을 받으면 장학기금으로 써왔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감사하다. 서대문구에 생긴 ‘철학자의 길’에 시비를 세우는 일에 예산이 필요하다던데, 거기에 쓸 지 판단해 보자”라고 했다.
조 고문도 미래 세대를 위해 장학회를 운영해 왔다. 그는 “우리 젊은이들이 현실이 힘들어도 꿈과 희망을 갖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나가는 노력을 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그는 “국내 정치 상황을 보면 좀 걱정이 되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켜갈 것으로 믿는다”며 “그래야 세계 속에서 더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도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기라며 우리나라의 좌파는 그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좋지 않게 보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며 “나는 기성세대가 잘못한 것도 분명히 지적하는데…”라며 웃었다.
그는 우리 정치가 대립과 갈등에 빠져 있는 것은 국내 권력 싸움에 매몰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운동권과 법조인들은 세계 안의 한국을 보며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장재선 기자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스위스그랜드 호텔 커피숍. 균형 잡힌 체격의 노신사가 1층 로비에서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왔다.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 올해 우리 나이로 94세인데, 바른 걸음걸이가 건강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일찍 오셨네요.” “선생님 뵙는데, 릴게임몰메가 당연히 일찍 와야지요.”
그가 언급한 선생님은 106세의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조 고문은 중앙고교 재학 때 당시 교사로 재직했던 김 교수로부터 철학, 윤리를 배웠다.
“선생님께서 ‘겸손해라’ ‘최선을 다해라’ 당부하신 말씀을 평생 지키고자 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6·25전쟁이 나서 졸업을 못한 채 선생님과 릴게임다운로드 헤어졌어요. 그 이후 뵙지 못했으나 늘 그리웠습니다. 더 늦기 전에 뵙고 싶어요.”
현재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는 조 고문은 최근 귀국해 서울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다. 그는 김 교수를 만난 적이 있는 문화일보 기자에게 은사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청했다.
김 교수는 조 고문의 만남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19 바다이야기부활 32년생 제자라니…, 하하.”
이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김 교수가 나타나자, 조 고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김 교수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를 껴안았다.
“내가 오면서 생각하니 우리 둘이 200세가 되더군요.”
김 교수가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조 고문도 함께 웃었다.
릴게임가입머니“우리 나이로 106세이신데,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숫자가 아니지요. 그 세월 동안 선생님께서 우리가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고, 그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뤄진 것이지요.”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1시간 반 동안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김 교수는 몸을 비스듬히 젖힌 자세였고, 조 고문은 의자에 엉덩이만 걸 릴게임야마토 치고 시종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김 교수는 여전히 유머가 넘쳤다. 두 사람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 “어때요? 누가 젊어 보여요? 비슷하지요?”라며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조 고문도 위트가 몸에 배어 있었다. 기자가 커피를 시키겠다고 하자, “나는 차 말고 돈으로 줘요”라며 싱긋 웃었다.
김형석 교수가 세계 최고령 저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책 ‘백년의 지혜’를 조중건 고문에게 주며 서명한 내용.
두 사람은 중앙고 창립자인 인촌 김성수에 대한 추억을 공유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 다음 날 학교장을 찾아갔어요. ‘학교 예금을 은행에서 찾아 교직원에게 3개월씩 월급을 먼저 지급하면 좋겠다’라고 제안했지요. 내 나이 30세 때이니 겁이 없었던 것인데, 창립자인 인촌 선생이 그걸 받아줬어요.”
조 고문은 인촌이 교정 잔디밭의 잡초를 직접 뽑고 화장실에서 오줌을 손수 퍼와 물에 타서 뿌리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중앙고 교사 시절에 자신이 했던 결심을 되돌아봤다.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나라다운 나라,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겠다.’
“내가 해방 직후 고향(평안남도 대동)에서 동네 선배 김성주를 만났잖아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공산당 행동대원 같았지요. 그해 10월에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열렸는데,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둔갑해 나타났어요. 소련 군정이 가짜를 내세운 걸 알게 됐지요. 여기선 나라다운 나라를 볼 수 없겠구나, 싶어서 남으로 온 거예요.”
조 고문은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지하실에 3개월 동안 숨어 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누군가의 밀고로 인민군에 붙잡혀 죽는구나 싶었는데, 당시 좌익이었던 친구가 나타나 ‘중건아, 빨리 도망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살아남았어요.”
제자는 곡진한 어투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상세히 전했다. 전쟁 때 자진 입대해서 육군 통역장교 등으로 근무한 것, 1955년 제대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한 것, 귀국 후 형(고 조중훈 전 대한항공 회장)이 창업한 한진상사에 합류한 것 등. 스승은 ‘응, 응…’ 하며 일일이 맞장구를 쳐주고 가끔 질문할 때는 존대어 어미를 썼다.
“형님은 몇 살 위예요?”
“열두 살 위입니다. 중간에 누님 넷이 있지요. 형님과 저는 참 배짱이 맞았습니다.”
조 고문은 베트남전에서 미군 물자를 운송하며 ‘외화 획득’을 했던 걸 되돌아봤다. 그는 민간인으로 전쟁터에 가서 수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능통한 영어와 타고난 기지로 미군의 신뢰를 얻어냈다(그의 친구인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대사는 어느 글에서 그에 대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의 특성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월남서 번 돈으로 대한항공을 인수한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1948년 설립된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조 브라더스가 맡아 달라’고 했어요. 당신이 죽기 전에 국적기를 꼭 타보고 싶다며 간곡히 청했지요.”
조 고문은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1952년 광주 포병학교에 근무할 때 교육을 받으러 온 박정희 대령을 처음 만났고, 그 이듬해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포병학교에서 한국군 장교들을 가르칠 때 그를 또 만났다. 그런 인연으로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영어 이름 ‘찰리(Charlie)’로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한 항공사를 ‘조 브라더스’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정치권의 무분별한 압력 탓에 어려운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기업 하기 힘들었어요.”
제자는 스승에게 짐짓 하소연조로 말했다. 스승은 “대한항공과 같은 기업들을 우리 정치가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제자를 어루만졌다.
대한항공 부사장, 한일개발 사장, 대한항공 사장을 거쳐서 부회장을 지낸 후 1990년대 말에 하와이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조 고문은 “조카들이 대학 졸업했으니 부딪치지 않으려 떠난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내가 대한항공을 930여 번 탔더라”며 “국내선도 꼭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일을 돕고 있는 이종옥(80·아가페복지법인 이사장) 씨는 “강연을 다니시며 그 많은 집필 활동을 하시는 걸 보며 늘 경탄한다”라고 했다.
조 고문은 “선생님 집필을 지원하는 뜻으로 약소하나마 1000만 원을 드리고 싶다”라고 했다. 이 씨는 고마움을 표하며 김 교수가 이런 후원금을 받으면 장학기금으로 써왔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감사하다. 서대문구에 생긴 ‘철학자의 길’에 시비를 세우는 일에 예산이 필요하다던데, 거기에 쓸 지 판단해 보자”라고 했다.
조 고문도 미래 세대를 위해 장학회를 운영해 왔다. 그는 “우리 젊은이들이 현실이 힘들어도 꿈과 희망을 갖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나가는 노력을 해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그는 “국내 정치 상황을 보면 좀 걱정이 되지만,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켜갈 것으로 믿는다”며 “그래야 세계 속에서 더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도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기라며 우리나라의 좌파는 그걸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좋지 않게 보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며 “나는 기성세대가 잘못한 것도 분명히 지적하는데…”라며 웃었다.
그는 우리 정치가 대립과 갈등에 빠져 있는 것은 국내 권력 싸움에 매몰된 탓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운동권과 법조인들은 세계 안의 한국을 보며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장재선 기자